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향군인의 날인 11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헌화한 뒤 비를 맞으며 돌아서고 있다. 알링턴/UPI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과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취임과 더불어 미국의 ‘새로운 비전’을 세상에 천명했고,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지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센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된 그는 수십년간 여러 나라가 끈기 있게 토론하고 협상해 결론에 이른 여러 합의를 무시하고 무산시켰다. 그가 내뱉은 말과 지킨 약속을 종합했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바뀔 것입니다. (중략) 오늘부터 새로운 비전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 비전은 미국 우선주의가 될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월20일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했던 이 발언은 현실이 됐다. 4년 동안 지속된 그의 돌출 행동은 이전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미국의 이익’ 혹은 ‘트럼프의 이익’이라는 렌즈를 통하면 어렵지 않게 해석됐다. 트럼프는 임기 동안 기후변화, 중동 갈등, 중국의 부상, 핵 문제, 이민 문제 등에 미국의 힘을 앞세워 그동안 쌓아온 질서와 성과를 무너뜨렸다.
“파리협정은 의회가 미국의 국익을 저해하는 데 동의한 가장 최근의 예시다. 이 협정은 그저 다른 국가들의 이익만을 위하며 내가 사랑하는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들에게 비용을 전가시킬 것이다.”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인 2017년 6월 트럼프는 파리협정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가입 3년 뒤에 탈퇴를 통보할 수 있고, 통보 1년 뒤 탈퇴가 확정되기 때문에, 실제 탈퇴는 미 대선이 치러진 지 하루 만인 이달 4일에야 이뤄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자는 내년 1월20일 취임 즉시 재가입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2016년 트럼프가 대선 공약으로 파리협정 탈퇴 카드를 꺼내들 때, 이를 실천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후변화를 늦춰 지구를 구한다는 목적으로 전세계 190여개국이 채택한 협정을 세계 최강국을 자처하는 미국이 앞장서 탈퇴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약대로 조약을 탈퇴했다. 그는 파리협정에 머물 경우 미국 국내총생산(GDP)이 30억달러(약 3조3400억원) 줄어들고, 일자리가 700만개 사라지며, 가계당 연간 수입이 7천달러(약 780만원)씩 줄어든다며 탈퇴를 강행했다. 책임이나 명분 따위는 개의치 않고, 눈앞의 이익을 우선하는 특유의 ‘거래의 기술’이 발휘됐다. 트럼프의 주장에는 거짓이 적지 않다. 그의 계산에는 탄소배출량이 그대로일 경우 입게 될 피해나, 이를 줄일 경우 얻게 되는 미래의 이익, 재생에너지 산업 등에서 창출되는 일자리 등은 고려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11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질문자를 지목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기후변화는 사기”라는 신념을 가진 트럼프는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의 기후변화 대응 사업을 지원하는 녹색기후기금(GCF)에도 애초 약속했던 돈을 내지 않았다. 미국은 2013년 12월 출범한 녹색기후기금에 3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 10억달러를 냈으나 트럼프 행정부 들어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반이스라엘 성향 이유로…유네스코 탈퇴! 유엔인권이사회 탈퇴!
“20년이 넘는 포기 후에도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지속적인 평화협정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할 때라고 결심했다.” 미국의 유네스코 탈퇴, 미국의 유엔인권이사회 탈퇴, 미국의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자금 지원 중단…. 연관성을 찾기 힘든 이 행동들의 공통점은 바로 트럼프의 친이스라엘 행보다. 교육과 과학,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유네스코의 경우 2017년 10월 반이스라엘 성향이 크다는 이유로 탈퇴를 발표했다. 유엔 회원국의 인권 문제를 점검하고 지도하는 유엔인권이사회는 이듬해 6월 이스라엘에 대한 고질적 편견이 있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두 달 뒤인 8월에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가 반이스라엘적이라며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임기 내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더 강하게 이스라엘에 치우친 행보를 걸었다. 특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것은 트럼프가 실천한 친이스라엘 행보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그가 2017년 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하며 내세운 이유는 ‘평화 정착’이었지만,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수십년 묵은 갈등은 물론 불안한 중동 정세에 기름을 붓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예루살렘 수도 선언 뒤 팔레스타인은 “지옥문이 열렸다”며 반발했고, 이슬람권은 물론 미국의 맹방인 영국과 유럽연합, 사우디아라비아도 반대 의견을 냈다. 브라질과 과테말라, 루마니아 정도만 미국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이전하겠다고 동조했다. 미국 의회는 1995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설치하는 내용의 ‘예루살렘 대사관법’을 통과시켰다.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전임 대통령들은 그 폭발력을 우려해 이를 6개월 단위로 유예해왔으나, 트럼프가 22년 만에 실천에 옮겼다. 트럼프의 강력한 친이스라엘 행보는 그의 핵심 지지층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을 챙기려는 의도가 컸다. 그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기부한 미국 내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려 한 행동이기도 하다.
2017년 10월12일 한 시민이 백악관 근처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 분장한 채 이란과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미국이 최대 지렛대를 가진 시점, 이 위험한 거래는 테러 정권 이란에게 경화(언제든지 금이나 다른 화폐로 바꿀 수 있는 화폐)를 포함한 엄청난 달러를 안겨주었다. (중략) 미국은 더 이상 공허한 위협을 하지 않는다. 내가 약속하면 이행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5월 이란 핵협정(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2015년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 등 6개국이 경제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 역사적 협정이었다. 2016년 이란 핵협정 탈퇴를 대선 공약으로 내놓은 트럼프는 취임 이후 1년 넘게 이를 만지작거리다 ‘나는 약속하면 지킨다’는 메시지를 던진 뒤 전격 실행했다. 다른 협정 참가국의 격렬한 반대도 소용없었다. 유대계를 의식한 조처이자,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의 핵심 외교 실적 중 하나를 지우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후 미국의 강력한 제재가 재개됐고, 이란의 경제 위기는 가중됐다. 중동의 미군 시설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고, 배후는 이란으로 의심됐다. 갈등은 심각해졌다. 2018년 12월31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친이란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1월3일 미국은 이란 군부 실세로 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인 쿠드스의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암살했다. 다시 이란은 이라크의 미군기지 두 곳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보복했고, 100명 넘는 미군이 다쳤다. 당시 국제 언론은 두 국가가 전쟁 직전의 상태라고 분석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사무총장이 감염병 대처에 반복적 실수를 함으로써 전세계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했다. 세계보건기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중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우리 행정부는 이미 세계보건기구의 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트럼프가 세계보건기구를 탈퇴하겠다며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 앞으로 보낸 서한의 일부다. 트럼프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세계보건기구가 중국의 감염병 발생 은폐를 돕고 늑장 대응을 했다며, 자금 지원을 보류하고 기구의 개혁을 요구했다. 이어 지난 7월 세계보건기구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미국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세계보건기구 2018~2019년 예산을 보면, 미국은 2년간 총 8억9300만달러(약 1조원)를 지원했다. 세계보건기구 전체 예산 56억2300만달러의 15.9%다. 같은 기간, 중국은 8600만달러(약 960억원)를 지원했다. 국제사회는 코로나19 사태 초반 세계보건기구가 보인 소극적이고 친중국적인 행보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미국이 탈퇴로 문제를 푸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우려했다. 예산·조직 등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국제 조직을 흔들어 무력화하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세계보건기구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운 데는 미국 내 코로나19 대유행 사태에 대한 책임 전가적 성격도 짙다. 트럼프는 사태 초반 느슨하게 대응해 미국이 가장 심각한 코로나19 유행국이 되도록 방치했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이 책임을 중국과 세계보건기구에 떠넘기려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바이든 당선자는 대선 전, 대통령이 되면 세계보건기구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했다. 미국의 탈퇴는 아직 발효되지 않아 트럼프의 탈퇴가 시행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가운데)이 지난 1월30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신종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제네바/신화 연합뉴스
“우리는 글자 그대로 합의사항을 이행한 반면, 러시아는 반복적으로 조건을 위반해왔다. 이것이 미국이 공식적으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이유다. (중략) 중국과 다른 나라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합의에 대해 협상할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아닐 수도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8월, 냉전 시대 때인 1987년 러시아와 맺은 ‘중거리핵전력조약’을 탈퇴했다. 이 조약은 사거리 500~5500㎞의 지상 발사 탄도·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아,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조약으로 2700기의 미사일이 제거됐고, 구체적이고 엄격한 검증을 합의해 모범적 선례를 남긴 조약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물론 유럽연합이 만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러시아가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조약을 탈퇴했고, 러시아 역시 미국이 오랫동안 조약을 위반해왔다며 탈퇴했다. 냉전 상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대로 양국은 군사 경쟁에 들어갔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가 중국을 견제해 이 조약을 탈퇴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또 다른 탈퇴 이유로 중국의 자유로운 미사일 개발을 들었고, 이후 미국은 아시아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상원 청문회에서 당시 태평양사령부 사령관 해리 해리스는 “중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의 당사국이었다면, 중국 미사일 전력의 약 95%는 이 조약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며 “미국은 러시아와의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의해 (묶여 있어 중국과) 상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중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어 지난 5월 상호 영공 개방과 사찰을 허용하는 ‘항공자유화조약’에서도 탈퇴했다. 미국은 탈퇴 이유로 러시아가 해당 조약을 위반한다고 밝혔다. 이 조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총 34개국이 참여한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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