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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0㎞ 험로 뚫고 왔는데…'유럽방패' 그리스에 막힌 난민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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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캠프 화재로 갈곳 잃은 1만여 아프간 난민들 속사정
그리스 레스보스섬 모리아 난민캠프의 화재로 머물 곳을 잃은 이주민 남녀가 지난 10일 길가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앉아 있다. 레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그리스 레스보스섬 모리아 난민캠프의 화재로 머물 곳을 잃은 이주민 남녀가 지난 10일 길가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앉아 있다. 레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탈리브샤흐 호세이니(37) 가족이 모리아 난민캠프에 들어온 지 9월23일로 꼭 9개월18일째다. 호세이니 가족은 지난해 고향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올해 초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난민캠프에 도착했다. 파리마(9), 파리사(7), 마르잔(4) 세 딸과 신장이 아픈 아내와 함께였다. 호세이니는 아프간 북부 파르야브 국립극장 단원이었다. 지역 방송과 영화에 출연하는 등 제법 유명한 배우였지만, 탈레반을 비판하고 아프간 정부군을 두둔하는 쇼에 출연하면서 인생이 급전직하했다. _______
탈레반 피해 그리스 온 호세이니 가족…“지금 후회한다”
“나는 조국과 정부, 내 일을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탈레반의 표적이 된 이후 호세이니뿐 아니라 가족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 지난해 온 가족을 이끌고 아프간을 탈출했다.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큰딸 파리마는 여러 언어를 습득했다. 그런 딸이 자랑스럽지만, 딸은 아빠를 싫어한다. “아빠가 나의 학교를 빼앗아 가서 행복하지 않다”는 불만이다. ‘유럽의 관문’ 그리스까지 왔지만 호세이니 가족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8~9일 모리아 캠프에 불이 나 캠프가 전소됐다. 호세이니 가족은 새 텐트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거리로 나앉았다. 호세이니는 “물도, 식량도, 화장실도, 의사도 없다. 정신적 문제까지 겪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아프간에서 떠나왔는지) 후회로 가득하다”고 <비비시>(BBC)에 말했다.
지난 9일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에 불이 나, 난민들이 짐을 싸서 피하고 있다. 레스보스/AP 연합뉴스
지난 9일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에 불이 나, 난민들이 짐을 싸서 피하고 있다. 레스보스/AP 연합뉴스
정원 3천명인 모리아 캠프에는 4배가 넘는 1만3천명이 수용돼 있었다. 이 가운데 70% 이상, 대략 1만명이 아프간에서 왔다. 오랜 전쟁과 탈레반의 박해에 시달린 난민과 이주민들은 안전과 직업, 아이 교육 등을 위해 유럽으로 향한다. 아프간에서 그리스까지 육로로 4750㎞, 이들은 어떤 여정을 거쳤을까. 2017년 말 국제인권단체 리치(REACH)와 엠엠피(MMP)가 함께 펴낸 ‘아프간에서 유럽으로의 이주’ 보고서를 보면, 아프간을 탈출한 이들은 파키스탄, 이란,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온다. 비행기를 타는 경우도 있지만 버스 등 육로로 터키에 간 뒤 배로 그리스에 건너간다. 그리스에서 난민 심사를 통과하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로 간다. 대다수 아프간 난민의 최종 목표지는 일자리가 많고 난민에게 우호적인 독일이다.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이란-터키-그리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을 거쳐 독일까지 빠르면 석 달 만에 갈 수 있지만, 운이 좋은 경우다. 난민캠프에서 9개월 넘게 기다리는 호세이니 가족처럼, 그리스에서 발이 묶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길게는 4년 동안 머문 경우도 있다. 이번 모리아 캠프 화재도 난민 심사에서 떨어진 아프간 청년들이 불을 낸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1일 그리스 레스보스섬 미틸리니에서 난민과 이주자들이 새로운 난민 수용소 설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레스보스/AP 연합뉴스
지난 11일 그리스 레스보스섬 미틸리니에서 난민과 이주자들이 새로운 난민 수용소 설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레스보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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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폐쇄 정책…코로나가 심사 기간 더 늘려
4750㎞를 달려온 아프간 탈출 여정도 그리스에서 막히면 도리가 없다.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 난민 문제에 폐쇄적인 유럽은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태도가 더욱 강화됐다. 2015~2016년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100만명 이상의 난민으로 큰 홍역을 치른 유럽연합(EU)은 유럽·아시아의 경계국, 터키와 난민협정을 맺었다. 터키는 이주민을 차단해 수용하고, 유럽연합은 대가로 60억유로를 지원하고 터키인에게 ‘무비자 입국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 약속으로 터키는 370만명 이상의 이주민을 수용한 세계 최대 난민 수용국이 됐지만 유럽연합은 약속한 금액을 집행하지 않고, 터키의 무비자 입국도 시행하지 않았다. 결국 올 3월 터키가 국경을 개방해 버리자, 그리스 등 인접국으로 수만명의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터키를 방파제 삼았던 유럽연합은 그리스를 ‘유럽의 방패’라 치켜세우며 난민 수용과 재정 지원을 맞바꿨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그리스 국경은 유럽의 국경”이라며 난민 봉쇄를 요구했고, 그 대가로 7억유로와 병력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레스보스 등 자국 섬들이 터키에 바짝 붙어 있는 그리스는 후폭풍을 고스란히 겪고 있다. 레스보스를 비롯해 사모스, 키오스, 레로스, 코스 등 5개 섬에 정원을 초과한 난민이 수용됐고, 주민들과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해 그리스에 체류하는 난민 규모는 7만4482명으로 2년 전(3만6310명)보다 갑절 넘게 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난민들의 어려움이 커졌다. 유럽 전역의 행정이 축소돼 난민 심사가 지체되거나 취소됐다. 좁은 지역에서 텐트 생활을 하는 이주민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졌다. 이주민들을 포용해 2016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됐던 레스보스섬 주민들은 난민촌 확대가 추진되자 반대 시위에 나서는 등 갈등은 임계치를 넘고 있다.
지난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시민들이 그리스 난민 수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지난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시민들이 그리스 난민 수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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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난민 수용 적극적…2015~2016년 100만명 수용 긍정 경험 때문
유럽의회 순회의장국 독일이 이주민 수용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나마 희망적이다. 독일 정부는 모리아 난민캠프에서 2750명을 수용할 계획이다. 캠프 인원(1만3천명)의 20% 수준이지만, 다른 나라들의 수백명 수용에 견주면 압도적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일 시민들은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하라”고 정부에 촉구한다. 20일 수도 베를린과 쾰른, 뮌헨, 라이프치히 등 독일 40여개 도시에서 모리아 난민캠프 난민과 이주민을 추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독일 국민들이 다른 유럽국과 달리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 이유는 2015~2016년의 경험 때문이다. 당시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결단으로 100만명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다. 난민과 이주민에 의한 일부 폭력과 테러 공격으로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메르켈 총리는 “정치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보호를 규정한 헌법의 원칙을 유지할 것”이라며 일관된 난민 수용 정책을 유지했다. 초기 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은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했고, 국가 재정도 건전성을 유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에는 난민 수용에 대한 자신감과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돼 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특정국에 난민 몰리게 하는 ‘더블린 조약’ 바뀌나 ‘첫발 디딘 국가에 난민 신청’ 문제
그리스는 개정 찬성…폴란드 등 반대 그리스 난민캠프 전소 사태를 계기로, 유럽연합(EU)의 난민 정책을 규정한 ‘더블린 조약’을 손봐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하지만 조약의 혜택을 보는 나라들이 개정 반대 입장을 보여 전면적인 개정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더블린 조약’을 손보겠다고 공언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23일 ‘이주·망명 신조약’을 내놨다. 유럽연합 각 회원국들이 난민이 처음 입국하는 국가로부터 난민을 받거나, 이를 원치 않을 경우 망명 신청이 거부된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맡자는 내용이다. 더블린 조약으로 인해 유럽 특정 국가에 난민이 몰리는 부작용을 해결해자는 취지가 담겼다.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가 지난 8~9일 화재로 전소된 뒤 새로 지어진 임시 텐트 앞을 지난 21일 한 아이가 지나가고 있다. 레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가 지난 8~9일 화재로 전소된 뒤 새로 지어진 임시 텐트 앞을 지난 21일 한 아이가 지나가고 있다. 레스보스/로이터 연합뉴스
1990년 체결된 더블린 조약은 이주민이 유럽연합에 처음 발을 디딘 나라에 망명이나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주민들이 망명 국가를 고르는 이른바 ‘망명지 쇼핑’을 막는 효과 등이 있지만 난민 발생 지역에 가까운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 특정 국가에 난민 부담을 지우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번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제안은 유럽연합 정상회의와 유럽연합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나라별로 사정이 워낙 달라 통과까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유럽연합의 조약 수정 방침에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찬성 입장을 내놨지만, 폴란드와 헝가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은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2015년에도 유럽연합은 난민 회원국의 경제 규모 등에 맞춰 난민 수용자를 할당하는 ‘난민 쿼터제’를 도입했지만, 다수 국가가 국내 여론의 반발 등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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