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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쫓겨나기전 30억 답지…희생자 아들 "엄마표 김치찌개 그립다" - 중앙일보 - 중앙일보

미국 애틀랜타에서 총기 난사범에 희생된 현정 그랜트씨의 장남 랜디 박씨. 둘루스(조지아주)=박현영 특파원

미국 애틀랜타에서 총기 난사범에 희생된 현정 그랜트씨의 장남 랜디 박씨. 둘루스(조지아주)=박현영 특파원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은 아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당장 보름 뒤면 집을 비워야 할 판이었다. 가족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가 총기 난사범에 희생되면서 동생과 미국 땅에 단둘이 남겨졌다.

애틀랜타 총기난사 희생자 아들 인터뷰
"집세 내게 도와주세요" 전 세계서 후원
한인 4명 신원 확인…50~70대 여성들
노숙자 식사 봉사, 오바마 표창 수령자도

 
지난 16일(현지시간) 애틀랜타 시내 마사지숍 '골드 스파'에서 일하다 총에 맞아 숨진 현정 그랜트(한국명 김현정·51) 씨의 장남 랜디 박(23) 씨 이야기다. 앞날이 막막했던 박 씨는 모금사이트 '고 펀드 미'에 사연을 올려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는) 동생과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싱글맘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오랫동안 슬퍼할 시간이 없다. 앞으로 몇 달, 어쩌면 1년 동생과 내가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든 기부금은 식비와 공과금, 기타 경비 등 나와 동생의 기본 필수 생활비로 사용될 것이다. 적어도 한 달 더 지금 집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
 
목표 모금액은 2만 달러(약 2260만원)로 정했다. 개설 이틀 만에 그 100배가 넘는 270만 달러(약 30억원)가 모였다. 전 세계에서 7만1200명이 단돈 몇 달러부터 최고 1만 달러까지 내놓았다.
 
랜디 박 씨가 모금을 위해 개설한 '고 펀드 미' 계정에 21일(현지시간) 270만 달러가 모였다. [홈페이지 캡쳐]

랜디 박 씨가 모금을 위해 개설한 '고 펀드 미' 계정에 21일(현지시간) 270만 달러가 모였다. [홈페이지 캡쳐]

 
20일 애틀랜타 교외 덜루스 자택에서 만난 박 씨는 거액을 기대하기는커녕 목표 금액도 못 채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그날 밤 엄마(my mom)가 일하러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모든 돈과 후원을 기쁜 마음으로 단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엄청난 금액이다. 당연히 겁이 난다. 책임감 있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에만 사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씨는 “엄마는 우리 형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다”고 기억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혼자 생계를 도맡고, 아들들에게는 "그 나이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놀아야 한다"며 아르바이트조차 시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들었다고 박 씨는 전했다
 
랜디 박 씨의 어머니 현정 그랜트 씨가 일했던 애틀랜타 시내 '골드 스파' 앞에서 지난 19일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랜디 박 씨의 어머니 현정 그랜트 씨가 일했던 애틀랜타 시내 '골드 스파' 앞에서 지난 19일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대신 어머니는 쉬지 않고 일했다. 적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달까지 집에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박 씨는 "엄마는 처음엔 친구들과 메이크업 샵에서 일한다고 말했는데 나중에 엄마 일터가 마사지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거짓말에 실망해 대들면서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조지아주 수사당국은 용의자 체포 직후 범행 동기가 섹스 중독이라고 발표해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8명의 사망자 가운데 7명이 여성이고, 그중 6명이 아시아계인 이번 사건은 인종 또는 젠더에 대한 증오가 바탕이 됐을 가능성이 있는데, 수사 초기에 이를 배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씨는 “용의자가 섹스 중독이라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수사 결과 만약 증오 범죄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수사당국이 무지를 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총격이 있고 두세 시간이 지난 뒤 총기 난사에서 생존한 어머니의 동료 딸로부터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하며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경찰 제지로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 저녁 엄마가 집에 오지 못했을 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장이 된 박 씨는 "엄마가 그랬듯 이젠 내가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면서 "모든 게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이후 엄마가 편히 쉬도록 애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씨는 조지아주립대를 휴학하고 최근 베이커리 카페에서 캐셔 겸 바리스타로 일했다. 두 살 터울 동생 에릭(21) 씨는 대학 재학 중이다.
 
박 씨는 "누구나 자기 엄마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지만,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는 정말로 맛있다. 김치찌개를 한 날이면 큰 대접에 밥을 세 그릇씩 먹었다"고 기억했다.
 
"엄마한테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못 배운 게 후회되요.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엄마가 한 김치찌개가 아직 냉장고에 있어요. 먹어도 괜찮을까요?"
 
김치찌개는 염분 때문에 쉽게 상하지 않는다고 알려주자 박 씨는 "그럼 밥해서 마지막 엄마표 찌개를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총기 난사가 일어난 미국 애틀랜타의 마사지샵 앞에서 21일(현지시간) 추모객들이 '아시아인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인종주의가 바이러스'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총기 난사가 일어난 미국 애틀랜타의 마사지샵 앞에서 21일(현지시간) 추모객들이 '아시아인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인종주의가 바이러스'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인 여성 희생자 4명 신원 공개 

전날 애틀랜타 경찰은 총격범 로버트 앨런 롱(21)이 살해한 한인 여성 4명의 이름과 나이, 성별, 사인을 공개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 4명이 한인이라고 확인했다. 그랜트 씨 외에 박 모(74) 씨, 김 모(69) 씨, 유 모 씨(63)가 숨졌다. 
 
박 씨는 뉴욕시에서 거주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조지아주로 내려와 마사지숍 운영을 도왔다고 사위 스콧 리 씨가 워싱턴포스트(WP)에 밝혔다. 박 씨가 젊었을 때는 무용수 생활을 했으며, 지난해 코로나19 때문에 가족이 만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김 씨는 1980년대 남편과 자녀 1남 1녀와 함께 이민 왔다. 텍사스주 미군 부대 식당, 편의점, 사무실 청소까지 닥치는 대로 일해 생계를 꾸리는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여러 단체를 위해 자원봉사를 한 가톨릭 교인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워싱턴 DC 일대에서 노숙자를 위한 식사 봉사로 대통령 자원봉사상도 받았다고 한다. 김 씨 가족은 지난 19일 애틀랜타를 찾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김 씨의 평소 소원은 남편과 함께 나이 들면서 자녀 2명과 손주 3명이 알찬 삶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고 알렸다. 
 
유 씨의 아들 로버트 피터슨 씨는 지역 매체인 애틀랜틱저널컨스티튜션(AJC)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코로나19로 실직했다가 최근 다시 일할 수 있게 돼 즐거워했는데 참변을 당했다고 전했다. 미군인 아버지를 만나 1980년대 조지아주로 오게 됐다고 한다.
 
덜루스(조지아주)=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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